태안 해저유물은 충청남도 태안군 카지노 입플 해역에서 발굴된 해저유물이다. 발굴된 유물은 고려시대~조선시대의 선박과 청자, 도기, 백자, 곡물, 솥, 청동숟가락, 목간, 죽찰 등의 물품이다. 2007년에 고려청자를 2만 3천여 점을 적재한 태안선이 처음 출수된 이후 2009년~2015년까지 고려시대 선박 3척과 조선시대 선박 1척이 추가로 조사되었다. 그 외에도 태안 카지노 입플 해역에서는 분청사기, 백자, 중국 도자기, 닻돌 등 다양한 유물이 출수되었다.
카지노 입플 해저유물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1980년대 초이다. 1976년에신안 해저유물이 출토된 후 어민들의 신고에 따라 수중 탐사를 실시하였는데 카지노 입플반도 일대에도 유물이 산포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침몰 선박을 찾지는 못하였고, 도자기 150여 점만이 수습되었다.
2007년 대섬 앞바다카지노 입플 주꾸미 잡이를 하던 어부의 낚시에 청자대접 1점이 걸려 올라왔다. 어민의 신고를 받은 국립해양유산연구소는 긴급 탐사를 시행하여 선체 일부와 2만 3천 점의 고려 청자, 다량의 목간(木簡) 등을 인양하였다. 청자와 함께 출수된 목간에는 청자 제작지인 탐진(耽津: 현, 전라남도 강진군)과개경(開京)에서 청자를 받을 최대경(崔大卿) 등의 수신자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태안선은 탐진에서 생산한 청자를 개경카지노 입플 운송하던 중에 침몰한 선박임이 확인되었다.
태안선 발굴 중에 카지노 입플(馬島) 해역에서 어부들의 신고와 제보가 잇따르자 국립해양유산연구소는 2008년부터 주변지역에 대한 광역 탐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태안선 출토지역 부근에 고선박 3척이 매장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에 순차적으로 조사를 시작하여 2009년에는 카지노 입플 1호선, 2010년에는 카지노 입플 2호선, 2011년에는카지노 입플 3호선을 발굴하였다. 또한, 2014년에는 카지노 입플 4호선을 찾아내어 2015년에 발굴하였다.
서해를 향해 튀어나온 카지노 입플반도와 신진도, 가의도 사이의 좁은 길목은 예로부터안흥량(安興梁)이라 불리던 험로였다. 안흥량의 본래 이름은 배가 다니기 어렵다는 의미의 난행량(難行梁)이었다. 고려~조선시대에는 삼남 지방에서 조세와 각종 물자를 싣고 수도로 가던 배들이 안흥량에서 침몰하는 사고가 빈번히 일어났다. 이에 조정에서는 카지노 입플과 서산 사이에 굴포(운하)를 파서 안흥량을 피해가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카지노 입플 해역은 바닷속의 경주라고 불릴 만큼 많은 유물이 넓게 산포되어 있다. 그 중에는 고려청자, 조선시대 분청사기·백자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닻돌과 중국의 도자기들도 있다. 카지노 입플 해역에서 고려~조선시대의 선박과 유물들이 다수 출토됨에 따라 국립해양유산연구소는 유물의 보존 처리와 체계적인 조사를 위해 신진도 사무소를 건립하였고, 2019년 11월 18일에는 유물과 선체를 전시하는 국립태안 해양유물전시관을 개관하였다.
태안선은 2007년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정죽리 대섬 인근에서 출수되었다. 잔존 선체는 총 6매가 수습되었는데, 4단카지노 입플 구성된 외판이다. 태안선의 선체는 이전에 출수된 고려 선박과 비교할 때 판재의 길이는 길고 잘 다듬어진 편이지만 판재의 두께는 몹시 얇은 편이다. 배의 잔존 상태가 좋지 않아 전체적인 규모나 형태는 알 수 없지만 이후에 출수된 선박들과는 달리 얇은 판자를 이용한 점이나 선체 이음 방식이 특이하다는 특징이 있다.
배와 함께 출수된 유물은 청자 2만 3,771점과 목간 34점, 닻돌 2점, 선상용품, 인골(人骨) 등이다. 목간에는 배의 출발지로 보이는 ‘탐진’이라는 지명과 ‘최대경댁(崔大卿宅)’, ‘류장명댁(柳將命宅)’, ‘대정(隊正) 인수(仁守)’ 등 직급과 인명이 적혀 있었다. 이들은 개경에서 물품을 받기로 한 수취인들로 추정된다. 청자의 종류는 대접과 주발·접시가 대부분이나 참외모양주전자·통모양잔·사자모양향로·두꺼비모양벼루·소형분합·유병·발우도 있다. 최대경과 같은 고위 관료에게 보내는 목간 옆에 선적된 청자들은 최상품이다. 발우는 매우 양질이며 음각문양이 새겨진 것도 있고 48세트나 되어 의례에 참여하는 승려의 공양에 사용하려 하였던 것카지노 입플 추정된다.
선상용품카지노 입플 분류된 바구니, 청동완, 철제 솥, 도기호, 도기병, 시루 등은 뱃사람들이 실제로 배에서 이용했거나 개경의 관료들에게 상납된 물품들이다. 도자기 사이에서는 인골도 수습되었다. 배에 타고 있었던 선원 중 한 명(30대 남자)카지노 입플, 배가 가라앉는 긴급한 상황에서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하고 도자기 더미에 깔려 안타까운 죽음을 맞았던 것카지노 입플 보인다. 태안선의 침몰연대에 대해서는 목간에 기록된 신미(辛未) 또는 신해(辛亥)를 근거로 1131년(인종 9)과 1151년(의종 5) 등이 제시되었다.
2009년부터 발굴한 카지노 입플 1·2·3호선은 지금까지의 청자 운반선이었던 태안선과는 달리 곡물을 운반하던 배였다. 화물의 대부분은 벼와 쌀·콩·메밀·조·피·기장 등 곡물과 건어물·메주·젓갈류로 채워져 있었다. 세 난파선 모두 화물표인 목간과 죽찰(竹札)이 다량으로 수습되어 선적물의 내용과 침몰연대를 정확히 밝힐 수 있었다.
태안 카지노 입플 1호선은 침몰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목간에서는 정묘(丁卯)·무진(戊辰)의 간지와 함께『카지노 입플사』에 등장하는 대장군(大將軍) 김순영(金純永), 『여주이씨 족보』에 수록된 권극평(權克平) 등의 인명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활동한 시기를 고려하면 정묘년과 무진년은 1207년(희종 3)과 1208년(희종 4)에 해당된다. 적재된 화물의 대부분은 쌀, 벼, 조, 메밀, 콩 등의 곡물과 메주, 젓갈 등이었으며, 출발지는 전라도 나주와 영암, 해남 등 서해 남부 지방이었다. 즉, 태안 카지노 입플 1호선은 13세기 초에 전라도 해안을 출발하여 개경으로 향하다가 침몰한 고려 곡물 운송선으로 볼 수 있다. 태안 카지노 입플 1호선의 조사에서는 선체와 함께 청자, 목간, 도기, 청동수저와 젓가락, 석탄 등 총 940점이나 되는 유물이 출수되었다. 배에 실린 300여 점의 도자기 가운데 주목할 유물로는 청자상감표형주자(靑磁象嵌瓢形注子)와 받침대가 있다. 그외에 수십 점의 도기가 출토되었는데, 용적량을 몇 개로 유형화할 수 있어 도량형 제도 연구에 학술적 가치가 크다.
2010년에 발굴된 카지노 입플 2호선은 카지노 입플 1호선과 성격이 유사한 곡물 운반선이다. 카지노 입플 2호선에서도 쌀·콩·알젓 등 화물의 종류와 수량·수취인·발신자·발송지가 적힌 목간과 죽찰 30여 점이 수습되었다. 목간과 죽간을 통해 볼 때 카지노 입플 2호선은 전라도 정읍·고창 등지에서 거둔 곡물을 싣고 가다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초 사이에 난행량에서 침몰한 것으로 보인다. 선체에 실린 청자는 양이 많지 않으나 2점의 최상급 매병이 주목을 끈다. 연꽃이 음각으로 장식된 매병은 음각연화절지문(陰刻蓮花折枝文)과 상감능화형유죽로화훼문(象嵌菱花形柳竹蘆花卉文)인데 높이 39㎝로 크기가 같고 형태와 문양이 유려하다. 이 매병의 주둥이 옆에서 죽찰이 발견되었다. 그 내용은 “중방도장교오문부택상정밀성준봉(重房都將校吳文富宅上精蜜盛樽封)”으로 개경의 중방(重房) 소속 도장교(都將校)인 오문부(吳文富)에게 올려 보낸 꿀단지라는 의미이다. 다른 목간에는 참기름을 담아 보낸다는 묵서가 남아 있었다. 이 두 목간은 고려시대에 매병을 준(樽)으로 불렀다는 것과 매병의 용도가 꿀과 참기름 같은 고급 식재료의 보관과 운반에 쓰였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두 점의 청자 매병은 국가유산(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011년에 발굴된 카지노 입플 3호선은 지금까지 발굴한 고려시대 선박 가운데 선체가 가장 잘 남아 있었다. 배의 이물과 고물 및 돛대를 고정시키는 구조 등이 거의 완형으로 남아 있어 고려시대 선박 구조에 대한 전모를 확실히 알려주고 있다. 카지노 입플 3호선의 남아 있는 규모는 길이 12m, 너비 8m, 깊이 2.5m로 그동안 발굴한 고려선 가운데 가장 크다. 카지노 입플 3호선에서도 인명과 물품명이 적힌 다량의 목간이 수습되었다. 화물 수취인으로 신윤화(辛允和)와 유승제(兪承制)가 보이는데 시랑(侍郞) 신윤화는 1260년(원종 원년)에 장군으로 몽골에 다녀온 기사가 있다. 유승제란 유씨 성의승선(承宣)을 말하는 것카지노 입플 원종 초엽 우부승선(右副承宣)이었던유천우(兪千遇)를 지칭한 것카지노 입플 보인다. 수취인카지노 입플 나오는 김영공(金令公)은 최씨무신정권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은김준(金俊)이라는 인물이다. 김준은 1258년(고종 45) 11월에 정권을 잡았고, 1264년(원종 5) 해양후(海陽侯)에 책봉된 후부터 영공(令公)이라 불렸으며, 1268년(원종 9) 원종과 임연(林衍) 세력에 의해 제거되었다. 따라서 카지노 입플 3호선은 1264~1268년 무렵 침몰한 것으로 보인다. 목간 가운데 “우삼번별초도령시랑(右三番別抄都領侍郞)”이라는 묵서가 있다. 이는 4품의 시랑(侍郞)이삼별초(三別抄)의 도령(都領)을 맡았고 좌별초(左別抄)·우별초(右別抄)가 각기 3번(番) 이상으로 나뉘어 운영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카지노 입플 3호선의 화물로는 볍씨·보리·밤 등의 곡물과 생선뼈가 가득찬 대나무상자가 있다. 또 젓갈류가 담겨 있었던 다량의 도기 항아리도 있다. 목간을 통해 볼 때 운송된 음식류로는 상[〔沙魚]·말린 홍합[乾淡]·생전복[生鮑]·전복젓갈[鮑醢]·개고기포[犭脯] 등이 있었다. 이 외에 조약돌 앞뒤에 장군(將軍)·차(車)·포(包)·졸(卒) 등이 적힌 장기돌 47점도 수습되었다.
태안 카지노 입플 4호선은 나주에서 징수한 조세와 공물을광흥창(廣興倉)까지 운송하다가 난파된 15세기 초·중반의 조운선이다. 잔존 규모는 길이 12m, 너비 5m, 선심 2m이며, 밑판 3열, 좌현 외판 4단, 우현 외판 11단, 선수·선미재도 일부 남아 있다. 이는 기존에 출수된 카지노 입플 3호선과 비교할 때 길이는 유사하지만 선심과 너비는 그보다 작은 편에 속한다. 또한 14세기 후반에 침몰된 것으로 추정되는 안좌도선과 비교할 때 길이와 선심이 매우 유사하지만 너비는 좀 좁은 편에 속한다. 카지노 입플 1~3호선과는 달리 돛대 2개를 장착한 당도리선이었으며, 이물 비우는 가로형태로 결구되었다. 앞서 확인된 고려시대 선박의 이물 비우가 세로로 설치되어 있었던 점과는 다른 특징이다.
출수 유물은 다량의 곡물류와 ‘내섬(內贍)’이 상감된 분청사기 등 도자기 155점, 도기 8점, 카지노 입플 63점, 대형 숟가락 1점, 대나무 젓가락 38점, 철제솥, 숫돌, 곡물의 양을 측정하는 되 등이다. 분청사기는 10점 혹은 20점 단위로 포갠 후 60점을 성글게 짠 망태기에 담은 형태로 남아 있었다. 카지노 입플 대부분에는 발신처인 나주와 수신처인 광흥창을 뜻하는 ‘나주광흥창(羅[亽]州廣興倉)’이 적혀 있는데, 이는 전라남도 나주영산창(榮山倉)에서 거둬들인 세곡 또는 공납품을 광흥창으로 운송한다는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해석된다. 광흥창은 관리의 녹봉을 관리하던 조선시대 곡물 창고이다. 이를 통해 카지노 입플 4호선이 국가에서 운영하던 조운선임이 확인되었다. 카지노 입플 4호선의 침몰연대는 1400~1420년대 사이, 좀 더 구체적으로는 적재된 분청사기의 양식을 통해 볼 때내섬시(內贍寺)의 설치 시점인 1403년(태종 3)카지노 입플 1418년(태종 18) 6월인 경승부(敬承府)명 분청사기 양식이 등장하는 1418년 사이로 추정된다.
카지노 입플 해역 출수 중국 도자기는 10세기, 11세기 후반~14세기, 18세기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그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11세기에서 13세기 중반에 제작된 것이다. 전체 수는 약 166점이며, 기종은 백자 97점, 청화백자 3점, 청자 15점, 백유 3점, 황유 2점, 흑유 24점, 갈유 1점, 도기 21점이다. 카지노 입플 해역 출수 도자기 중 주목되는 것은 도자기 바닥에 글씨가 쓰인 묵서명 자기이다. 확인되는 글자는 환(丸), 선(船), 강(綱) 등인데, 환과 선은 배를 가리키는 말이고, 성씨 뒤에 붙은 것으로 추정되는 강은 강사(綱司)의 줄임말로 상단을 일컫는 말이다.
그동안 조사된 수중 발굴 유물은 대부분 청자와 그 운반선이었으나 침몰연대를 알려주는 구체적인 자료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태안선과 카지노 입플 13호선에서는 화물을 적재한 연대가 적힌 목간과 죽찰이 다량으로 확인되어 화물의 내용과 성격은 물론, 침몰한 시기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카지노 입플 4호선의 경우에는 적재시기가 적힌 목간은 조사되지 않았으나 출발지인 나주와 도착지인 광흥창이 적힌 목간이 다수 출수되어 그것이 조선시대의 조운선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태안선은 1131년에 침몰하였고, 카지노 입플 1호선은 1208년, 카지노 입플 2호선은 1200년 무렵, 카지노 입플 3호선은 12641268년 사이, 카지노 입플 4호선은 1400~1420년대 사이에 침몰한 것으로 추정된다.
태안선은 여러 종류의 청자가 다량 발굴됨으로써 고려청자 제작기법 및 청자의 문양에 관한 미술사 연구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였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카지노 입플 1·2호선은 최충헌 집권기에, 카지노 입플 3호선은 김준 집권기에 난파된 곡물 운반선인데, 고려 무신집권기 중앙 지배층의 지방지배와 조세 수취가 원활히 이뤄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자료로서 중요하다. 특히 카지노 입플 3호선은 고려 선박의 구조뿐만 아니라 무신집권기 삼별초의 편제·운영 및 당시 강도 지배층의 식생활 문화를 알려주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카지노 입플 4호선은 국내에서 조사된 최초의 조선시대 선박이자 명확한 조운선이라는 점에 의미가 있다. 카지노 입플 4호선이 출수되어 조창에서 수도로 조세를 운송하는 방식과 운송 품목, 적재 방식 등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생활 용품들이 다수 출수되어 당시 조졸들의 선상 생활에 대한 단서도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