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릉은 북한 개성특별시 개풍구역 청교면 장릉리 일대에 비정되는 고려 전기 제17대 인종의 능이다. 인종은 1146년(인종 24) 2월 정묘일에 보화전에서 승하하고 3월 갑신일에 나성 남쪽에 장례 지냈다. 후에 제18대 의종, 제19대 명종, 제20대 신종이 참배한 적이 있다. 장릉의 위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도성의 서쪽인 벽관동에, 『조선고적도보』에 의하면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장릉리에 있다고 한다. 이곳에는 제16대 예종 유릉이나 제20대 신종 양릉 등이 있고, 양식이 유사하다고 여겨지나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다.
고려 제17대 임금슬롯 사이트 슬롯사이트C778;슬롯 사이트 슬롯사이트C885;은 1146년(인종 24) 2월 정묘일에 보화전(保和殿)에서 승하하여 빈소는 건시전(乾始殿)이었고, 17일 후인 3월 갑신일에 나성(羅城) 남쪽에 장례를 지냈다.
그의 사후 제18대슬롯 머신 일러스트C758;슬롯 머신 일러스트C885;이 1148년(의종 2) 윤8월 12일(정묘)에는온라인카지노추천D0DC;온라인카지노추천C870; 슬롯 꽁 머니D604;슬롯 꽁 머니B989;을, 23일(무인)에는 세조(世祖: 태조 왕건의 아버지 추존왕. 왕륭(王隆)) 창릉(昌陵)을 찾으면서 27일(임오)에 부왕인 인종의 장릉(長陵)을 찾아 참배한 적이 있었다. 제19대무료 슬롯사이트BA85;무료 슬롯사이트C885;이 1173년(명종 3) 4월 3일(을축) 같은 날에 태조 현릉과 세조 창릉과 함께 부왕인 인종의 장릉을 참배하기도 하였다. 명종은 1186년(명종 16) 8월 23일(정유)에 부왕인 인종의 장릉과 모후인바카라 토토ACF5;바카라 토토C608;바카라 토토D0DC;바카라 토토D6C4;의 바카라 디시C21C;바카라 디시B989;을 참배하였다. 의종은 인종의 장남이었고, 명종은 인종의 셋째 아들로서 부왕과 모후의 능을 참배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인종의 손자이자 명종의 아들인토토 축구C2E0;토토 축구C885;또한 1198년(신종 1) 4월에 태조 현릉과 세조 창릉을 참배하면서 5월 1일 인종의 장릉과 공예태후의 순릉을 참배하는 등 12세기 초에서 무신집권기까지 아들과 손자들이 인종 장릉을 참배하기도 하였다.
사설 바카라C2E0;사설 바카라C99D에 의하면, 무덤의 위치는 도성의 서쪽인 벽관동(碧串洞)에 위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의하면 인종 장릉의 위치는 개풍군 주변인 청교면 장릉리 일대로 되어 있다. 개풍군 청교면에는 고려 왕릉이 다수 존재하였는데 『조선고적도보』의 지명으로 확인된다. 예컨대, 양릉리 안릉동에는 제3대카지노 사이트C815;카지노 사이트C885;의 바카라 도박C548;바카라 도박B989;이, 청교면 유릉리에는 제16대카지노 룰렛판C608;카지노 룰렛판C885;의 카지노 양상수C720;카지노 양상수B989;이, 청교면 양릉리 양릉동에는 제20대 신종의 양릉(陽陵), 청교면 총릉동에는 제30대슬롯사이트 소닉 추천CDA9;슬롯사이트 소닉 추천C815;슬롯사이트 소닉 추천C655;의 슬롯 머신 사이트CD1D;슬롯 머신 사이트B989;이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제17대 인종 장릉은 청교면 장릉리에 위치한 것이 확인되지만 해방 이후 정확한 동명이 없어 아직까지 정확한 위치가 드러나지는 않고 있다.
제17대 인종 장릉은 현재 그 위치를 찾지 못하여 능의 구조나 형태를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같은 개풍군 청교면에 위치하고 있는 제16대 예종 유릉이나 근처의 제20대 신종 양릉으로 미루어 볼 때 봉분(封墳)의 크기가 작고 석물(石物)도 작았다고 여겨진다.
인종 장릉이 세상에 알려진 계기는 1916년 도굴꾼과 결탁한 일본 골동품상이 장릉 출토품을 조선총독부박물관에 팔아넘긴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 출토품은 도굴 경력 때문에 진위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출토품 중에는 1962년 국보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중인 ‘청자 참외모양 병[靑磁瓜形甁]’이 있으며, 청자 합(盒), 청자 뚜껑 있는 잔(盞), 청자 받침대, 청동도장, 은제 수저 등이 있다. 이러한 유물들은 ‘황통 육년(皇統 六年)’이라는 명문이 적힌 시책(諡冊)과 함께 도굴되었다고 전해졌는데, 황통 육년은 고려 인종이 사망한 1146년에 해당되어 「인종시책(仁宗諡冊)」으로 밝혀졌다. 이처럼 인종 장릉의 무덤이 확인되지 않지만 도굴된 유물에 의해 인종 장릉의 존재를 추정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