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릉은 북한 개성특별시 선적리에 있는 고려 전기 제15대 숙종의 능이다. 1105년(숙종 10) 10월 기축일에 승하하여 송림현에 장례를 지냈다. 근래 발견된 바에 의하면 능구역은 남북 길이 29m, 동서 너비 13m, 3단으로 구획되어 있다. 1단에는 봉분과 2기의 석수 및 곡장을 둘렀고, 2단과 3단에는 문인석 1쌍씩 동서 6m를 사이에 두고 대칭으로 마주 서 있다. 1단의 무덤칸은 화강암 통돌로 남북 길이 3m, 동서 너비 1.2m,높이 1.6m이며 금박을 입힌 목관 조각 등 여러 유물이 출토되었다.
고려 제15대 임금슬롯사이트 꽁머니C219;슬롯사이트 꽁머니C885;왕희(王熙)[10541105년, 재위 10951105년]은 제11대바카라 총판BB38;바카라 총판C885;의 셋째 아들이고 제13대바카라 사이트 디시C120;바카라 사이트 디시C885;의 친동생이고 비는 명의태후(明懿太后) 유씨(柳氏)이다. 1095년 조카인 제14대카지노 해외D5CC;카지노 해외C885;이 어린 나이에 즉위한 지 1년 만에 외척 문벌귀족인꽁 머니 카지노 3 만C774;꽁 머니 카지노 3 만C790;꽁 머니 카지노 3 만C758;일파를 제거하고 조카를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하였다.바카라사이트ACE0;바카라사이트B824;바카라사이트C0AC;에 의하면, 1105년(숙종 10)토토 꽁머니 디시C11C;토토 꽁머니 디시ACBD;을 주1 카지노 찰리B3D9;카지노 찰리BA85;카지노 찰리C655;카지노 찰리BB18;에 제사하였다. 병이 들어 개경(開京)으로 돌아오다가 10월 병인일에 장평문 근처 수레 안에서 죽었는데, 향년 52세였다. 숙종이 임종할 때 자신의 능을 “검약하게 하는 데 힘쓰라.”고 유언하였고, 빈소는 선덕전(宣德殿)이고 장례일은 10월 갑신일이며 송림현(松林縣)에 장례 지냈다고 한다.
그의 사후 1주기가 되는 1106년(예종 1) 10월 경신일에바카라 룰C2E0;바카라 룰C8FC;를 우궁(혼전)에 봉안하였고,주2은 바카라 체험AC1C;바카라 체험C131; 바카라 체험AC1C;바카라 체험AD6D;바카라 체험C0AC;로 옮겼다. 이틀 후인 10월 임술일에 개국사에서 소상제(小祥祭)를 지냈다.
『고려사』 위숙군(圍宿軍)조에 의하면 숙종 영릉의 산직장상은 각 4명이었고, 고려 왕실은 능침 제도를 마련하였고 왕릉의 관리는 제릉서(諸陵署)를 두어 왕릉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거란과 몽골과의 전쟁 와중에 왕릉은 피해를 입었고, 고려의 멸망 이후에는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숙종 영릉의 위치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다시 방치되었으나, 조선 후기인 1662년(현종 3)부터토토 가상계좌 디시C219;토토 가상계좌 디시C885;때까지 고려왕릉의 보수와 관리를 하면서 고려 숙종 영릉은 능토가 훼손되지 않았고 석물이나 정자각 및 곡장도 남아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1818년(순조 18)에 능주가 분명한 영릉에 표석이 세워졌다. 일제강점기에 이곳을 조사하여 고려 숙종 영릉이라는 표석을 세웠으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흑백 유리 원판을 통해서도 그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영릉은 북한의 보존급유적 제569호로 지정되어 있었다가 2017년 재정비를 한 후 2020년 이후 북한 국보유적 제3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영릉은 심하게 황폐되어 있었으나, 2017년 8월 발굴조사 이후 정비하였다. 그렇지만 능역은 협소하며 남북 길이 29m, 동서 너비 13m이다. 영릉은 정면이 3단으로 구획되어 있으며 1단에는 봉분과 2기의 석수 및 곡장을 둘렀다. 일제강점기에 석수는 3단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현재는 1단으로 봉분 주위로 옮겨 배치하였는데, 양감이 풍부하며 조각이 우수한 호랑이상이다. 봉분을 두른 병풍석은 없어졌으며 봉분의 높이는 약 180㎝, 좌우 너비는 약 270㎝이다. 봉분의 정면에는 장명등(長明燈)의 잔석(殘石)이 있었고 간석(竿石)과 개석(蓋石)은 남아 있지만 격석(隔石) 등은 사라졌다. 2단과 3단에는 좌우에 사각 기둥형태의 문무인석 1쌍이 동서 6m를 사이에 두고 대칭으로 마주 서 있다. 문무인석(文武人石)의 형상은 머리에 쓴 관의 형태에서 각진 복두형과 둥근 원형의 차이를 보이지만 마모가 심하여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영릉의 무덤 칸인 현실(玄室)은 1단 아래에 있으며 입구는 도굴의 흔적이 있다. 무덤 칸 내부는 화강암 통돌로 남북 길이 3m, 동서 너비 1.2m, 높이 1.6m로 되어 있다. 내부에서는 금박을 입힌 목관 조각, 청동 숟가락 꼭지 조각, 용문 암막새, 봉황문 수막새, 용머리 잡상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영릉은 고려 제15대 숙종의 왕릉으로 1105년에 조성되었다. 12세기 초 왕릉으로 규모가 비교적 작은 편이지만 3단 구성에 1단에는 석호상이, 2단에는 문인석이, 3단에는 무인석이 조성되어 문무석인상의 배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비록 도굴되었지만 내부 무덤 칸에서 출토된 암막새나 수막새 및 잡상 등의 유물에서 용문이나 봉황문 등이 왕릉의 특징으로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