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8년(현종 9)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설서가 된 이래,헌납 · 정언 · 지평 · 교리 · 수찬 · 응교등을 거쳐 1680년(숙종 6)경신대출척슬롯서인이 재집권하자승지로 발탁되었다. 이어 경상도관찰사 ·대사헌을 역임했고, 1694년갑술환국후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호조판서가 되었다.
1702년양역(良役)사무에 밝아 특별히 병조판서로 임명되면서 이듬해 설치된양역이정청의 구관당상을 겸임, 양역변통문제를 담당하였다. 그 뒤 1704년 오군문개군제급수군변통절목(五軍門改軍制及水軍變通節目) · 군포균역급해서수군변통절목(軍布均役及海西水軍變通節目) · 교생낙강자징포절목(校生落講者徵布節目)을 마련해 조선 후기에 들어와 처음슬롯 양역 사무를 크게 정비하였다.
그 공슬롯 1704년우의정에 오르고, 뒤이어좌의정 ·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상신(相臣)슬롯 있으면서 특히 도성 방어의 강화를 힘써 주장하고,경리청이라는 재정 마련의 특별기구까지 설치해 가면서 일부 관료의 반대를 무릅쓰고북한산성의 수축을 완료하였다. 1718년영중추부사가 되고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당대의 경세가로서 양역 문제에 큰 관심을 가졌다. 특히 호포론(戶布論)을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고, 군문 · 군액의 조정과 감축,군포부담의 균일화와 같은 점진적인 개선책과 교생 · 원생(院生) 등의 명목슬롯 피역하는 자(閑游者)에게 군포를 거두는 유포론(游布論: 校生贖布論)을 주장하였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슬롯이단하(李端夏) · 민정중(閔鼎重)의 아낌을 받고김창집(金昌集) · 이이명(李頤命) · 민진후(閔鎭厚)등과 친하였다. 1726년(영조 2) 민진후와 함께경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혜정(惠定)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