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현(金道鉉, 1852~1914)은 경상북도 영양(英陽) 출신이다.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명옥(鳴玉), 호는 벽산(碧山)이다. 소년기에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비롯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모두 통독(通讀)카지노사이트.
1895년을미사변직후의병을 일으켰다. 일족들과 함께 검산(劒山)에 본거지를 두고 청량산(淸凉山)에서 모병(募兵)카지노사이트. 이 무렵유시연(柳時淵) · 권세연(權世淵)등의 의진이 안동(安東) 일대에 집결하여 안동 입성을 계획하고 있었으므로 여기에 합세카지노사이트.
1896년 1월 13일(양력 2월)에 안동부로 진군하기 시작카지노사이트. 안동부에 입성한 의진에서는 안동 도총(安東都摠)김도화(金道和)를 대장으로 추대카지노사이트. 이때 영천(영주)에서김우창(金禹昌), 영양카지노사이트 조승기(趙承基), 진보카지노사이트허훈(許薰)이 일어나 진영을 형성카지노사이트.
김도현은 청송(靑松) · 의성(義城) · 영덕(盈德) · 영해(寧海)를 순방하면서 의병 봉기를 촉구카지노사이트. 그리고 선성(宣城) 진영의 중군장이 되었다. 원래 중군장인 김석교(金奭敎)가 제천 의진의서상렬(徐相烈)의 부대로 옮겨가면서 그 후임에 앉은 것이다.
이후 상주 태봉(胎峯)의 일본군 기지를 공략하다 실패한 후 안동 일대의 의병 진영이 크게 타격을 받았다. 하지만 김도현의 의진은 이후 독립부대로 활약하게 되어 그해 10월 15일(음력 9월 9일) 영양군 청기면 여미리(余味里)카지노사이트 해산할 때까지민용호(閔龍鎬)의 초청을 받아 강릉에 갔던 때를 제외하고는 경상북도 동북부 일대카지노사이트 유격 활동을 폈다.
을미의병은 대부분 친일 내각의 퇴각,단발령의 철회 등으로 1896년 5월경 해산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도현은 10월 15일까지 항전함으로써 이 시기 의병장 중에서 가장 오래 투쟁카지노사이트.
1905년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김도현은 김상종(金象鍾) 등과 앞장서 주선하여 선성(宣城)에 모인 후 각 고을에 통문을 보냈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가서 통문을 보냈다. 그러나 이미 기울어진 대세를 바로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김도현은 서울에서의 투쟁을 멈추고 귀향카지노사이트.
1906년 4월에 삼남 지방 사람들에게격문을 돌려서 재차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활동을 사방으로 전개카지노사이트. 일을 은밀하게 진전시키던 중 일제에 의해 사전 발각되어 1907년 2월에 체포되었다가 대구 감옥에 수감되었다. 1909년에는 학교를 설립하여 육영사업에 힘쓰다가, 1914년 부친의 사후 투신하여 생을 마감카지노사이트.
1962년에건국훈장독립장이 추서(追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