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포청(捕廳)이라고도 한다. 좌포청(左捕廳)은 중부 정선방(貞善坊) 파자교(把子橋) 동북쪽(현재 서울 종로구 수은동 56번지 일대)에, 우포청(右捕廳)은 서부 서린방(瑞麟坊)혜정교(惠政橋) 남쪽(현재 종로구 종로1가 89번지 일대)에 있었다.
현재 우슬롯 꽁 머니청 건물이 언제 누구에 의해 이건(移建)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서울 성북구 돈암동 512의 60번지에 이건되어 형태가 보존되어 있다. ≪속대전≫에 의하면 ≪경국대전≫ 이후 창설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 명확히 알 수 없다. 조선 중기에 설치되었다고 하였으나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성종 초에 설치된 것으로 이해된다.
조선 초기 사법기관으로는 의금부·형조·한성부·사헌부 등이 있었다. 문종 때부터 슬롯 꽁 머니전담관(捕盜專擔官)을 설치하자는 논의가 있었고, 성종 초에는 박중선(朴仲善)을 슬롯 꽁 머니주장(捕盜主將)으로, 조한신(曺漢臣)과 홍이로(洪利老)를 슬롯 꽁 머니장(捕盜將)으로 삼은 기록이 보인다.
1474년(성종 5) 1월에는 슬롯 꽁 머니장 이양생(李陽生)이 많은 폐단을 일으켜 상설 슬롯 꽁 머니장을 폐지하자는 의견이 채택되었다가 3월에 다시 복설되었던 사실로 미루어, 슬롯 꽁 머니장은 그 이전에 이미 상설직으로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1481년 3월에는 슬롯 꽁 머니사목(捕盜事目)을 제정해 서울과 경기를 좌우로 나누고 2인의 슬롯 꽁 머니장이 책임을 맡게 하였다. 일시적으로 한성5부(漢城五部)에 1인씩의 슬롯 꽁 머니장을 두었지만, 대체로 2인의 슬롯 꽁 머니장제가 계속되었다.
슬롯 꽁 머니청에 관한 기록이 처음 보이는 것은 1540년(중종 35)이다. 이기(李岐)의 하인들이 도적을 잡아 슬롯 꽁 머니청에 고했는데 받아주지 않은 것은 슬롯 꽁 머니대장들이 부하를 소홀히 한 때문이라는 내용이다. 4년 후 슬롯 꽁 머니청에 도적을 신중하고 자세하게 심문하라는 전교(傳敎)가 내렸다는 기록이 보인다.
슬롯 꽁 머니청이 슬롯 꽁 머니대장과 달리 조선왕조실록에서 드물게 보인다. 이는 단일 기관이 아니고 좌·우슬롯 꽁 머니대장을 장으로 양립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슬롯 꽁 머니청의 실존은 성종 초부터 중종 이전으로 볼 수 있다.
≪속대전≫에서는 좌·우포청에 각각 대장(大將, 종2품) 1인, 종사관(從事官, 종6품) 3인과 부장(部將) 4인, 무료부장(無料部將) 26인, 가설부장(架設部將) 12인, 서원(書員) 4인씩을 두었다.
≪만기요람≫에는 대장과 종사관은 이전과 같고, 부장(部將)은 없고 군관(軍官) 각 70인, 군사(軍士) 각 64인씩으로 되어 있다. 슬롯 꽁 머니대장은 슬롯 꽁 머니청을 지휘, 감독하는 책임자로 다른 군사 지휘관을 겸할 수 없으며, 왕의 행차 때 수행하였고, ≪대전회통≫에 좌·우윤(左右尹)을 지낸 사람으로 임명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종사관은 문무당하관(文武堂下官)으로 임명해 슬롯 꽁 머니대장을 보좌하고 죄인의 심문을 주관하는 등 실무를 담당하였다. 부장·무료부장·가설부장은 군사를 지휘해 슬롯 꽁 머니나 순라에 임하였고, 서원은 중인신분으로 사무기록을 담당하였다.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에 좌·우포청을 폐합해 경무청(警務廳)을 설치하고 내무아문(內務衙門)에 부속시켰다. 그러나 책임자인 경무사(警務使)는 왕과 직결되어 독립된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경찰지휘권을 이용해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