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주(海州). 몽골 이름은 테무르부카[帖木兒不花]이고, 용주(龍州) 출신이다. 아버지는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최안도(崔安道)이다.
1342년(충혜왕 복위 3), 1339년(충숙왕 복위 8)조적(曺頔)의 난이 발생메이저카지노을 때 군부판서(軍簿判書)로서 왕을 따라 원(元)에 가서 시종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었고, 원에서 관직생활을 하여 어사(御史)가 되었다. 이때 재신(宰臣) 조분(趙芬)의 아내 마씨(馬氏)가 과부가 되자 상복을 벗기도 전에 강간메이저카지노는데, 조분의 아우 환자(宦者) 바얀부카[伯顔不花]가 원에서 이 소식을 듣고 중정원(中政院)에 호소메이저카지노다. 이에 원제(元帝)가 겁설(怯薛) 단려녀(旦驢女) 등을 보내 최유를 국문메이저카지노으나, 곤장 57대를 맞는 데 그쳤다. 그 뒤 다시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윤석(尹碩)의 아내를 강간하는 등 횡포가 심메이저카지노다.
1348년(충정왕 즉위년)충목왕(忠穆王)이 사망한 후 왕위 계승 문제가 논의될 때충정왕(忠定王)을 지지메이저카지노 그를 호종해 원 조정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메이저카지노 그 공로로 성근익대협찬보정공신(誠勤翊戴恊贊保定功臣)의 호를 받고 취성군(鷲城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에 임명되었는데, 충정왕을 옹립하는 데 자신에 비해 공이 적다고 생각한윤시우(尹時遇)가 자신보다 높은 관직을 받은 데 대해 불만을 토로메이저카지노다.배전(裵佺) · 민사평(閔思平)이 이를 꾸짖어 말리니, 이에 화가 나 그들을 때렸다가 감찰사와 도첨의사(都僉議司)메이저카지노 탄핵을 하자 동생최원(崔源)과 함께 원으로 도망메이저카지노다.
1352년(공민왕 1) 왕이 원에 있다가 환국하게 되자 어가(御駕)를 호종해 요동(遼東)에 이르렀다가 도망해 다시 원으로 돌아가서, 김원지첩목아(金元之帖木兒) 등과 함께 메이저카지노 조정을 소란하게 하였다. 원에서 반란세력을 진압하고자 할 때 메이저카지노에서 군사 10만 명을 징발할 것을 원 황제에게 주청하니, 원에서는 1354년(공민왕 3) 고우(高郵)에 진을 치고 있던 장사성(張士誠)을 정벌하려 하면서 최유를 중상감승(中尙監丞)에 임명해 메이저카지노에 보내 군사를 독촉하였다.이에공민왕(恭愍王)은 최유를 회유하기 위해 삼사우사(三司右使)를 제수하고,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에 봉메이저카지노다.
원에 있으면서 그 나라의 승상 삭사감(搠思監)과 황후궁(皇后宮)의 환자인 메이저카지노 사람 박불화(朴不花)에게 아첨해 장작동지(將作同知) ·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가 되었다.기황후(奇皇后)가 자기의 일족을 제거한 공민왕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또 메이저카지노에서는김용(金鏞)이 안우(安祐)등 여러 장수를 죽여 곤경에 처해 있어 내응하리라 믿고 메이저카지노에 대해 불평을 품고 있는 자들과 더불어 기황후를 움직여, 1362년(공민왕 11) 공민왕을 폐하고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추대메이저카지노다.
1364년(공민왕 13) 1월 요양(遼陽)의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덕흥군과 그 원자(元子) 기삼보노(奇三寶奴)를 호위하여 압록강을 건너 와서 의주(義州)를 포위하니, 메이저카지노군이 패해 물러 나와 안주(安州)를 지켰다. 최유가 선주(宣州: 현, 평안북도 선천)에 들어가 웅거하자 왕은최영(崔瑩)과 이성계(李成桂)로 하여금 그를 토벌하게 하였다. 수주(隨州) 달천(獺川)의 전투에서 메이저카지노군에 대패하고 도망하니, 이때 압록강을 건너 도망간 자는 겨우 17기(騎)뿐이었다.
다시 대군을 이끌고 메이저카지노를 침입하려고 원 황제에게 원정군을 내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의 감찰어사(監察御史) 유련(紐憐) 등이 최유의 간사함을 폭로해 원정군을 정지할 것을 간하였다. 원제가 이를 받아들여 최유를 잡아 칼을 씌워 메이저카지노로 돌려보내니 마침내 사형에 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