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6년(공민왕 15)에 선발되어 왕비로 책봉되었다.
안극인이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어 시중유탁(柳濯)등과 더불어 상서(上書)하여 노국공주(魯國公主)의 영전(影殿)을 옮겨 짓는 일인 마암역(馬巖役)을 중지하도록 간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쫓겨났는데, 이때 비도 함께 집으로 보냈다가 얼마 뒤에 소환되었다.
왕이 후사(後嗣)가 없어서자제위(子弟衛)의 청년들과 관계를 맺게 하여 아들을 얻고자 하였으나 비의 완강한 반대로 실패하였다.
1387년(우왕 13) 비를 위하여 부(府)를 세우고 자혜(慈惠)라 칭하고, 관속(官屬)을 두어 사무를 보도록 하였다.
1388년 이성계 등의바카라 보너스 기준C704이후 우왕이 강화(江華)에서 왕위를 물려주자, 백관이 전국새(傳國璽)를 받들어 대비의 위치에 있던 비에게 바치고, 마침내 비의 교서(敎書)로 우왕의 아들창왕(昌王)을 세웠다. 창왕 즉위 후 대신(臺臣)들이 비와 혜비(惠妃)·신비(愼妃)는 다 같이 정적(正嫡)이 아니므로, 다만 세록(歲祿)만 주기를 청하였다.
1389년 이성계 세력은 비의 교(敎)를 받드는 형식으로공양왕(恭讓王)을 세우고, 비를 높여 정숙선명경신익성유혜왕대비(貞淑宣明敬信翼成柔惠王大妃)로 삼고 책문(冊文)을 내렸다.
1392년(태조 1) 조선 태조의 즉위 때도 대비 자격으로태조(太祖)에게 옥새(玉璽)를 넘겨주었다. 같은 해 의화궁주(義和宮主)로 책봉되었다.
1428년(세종 10)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