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토 롤링(1887~1946)은 강원도 춘성군 신동면 송암리에서 성장하였다. 한학에 조예가 깊은 가문에서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906년 서울로 유학을 떠나 보성중학교와보성전토토 롤링교에서 근대 교육을 받았다. 보성전토토 롤링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다. 1946년 3월 24일 사망하였으며, 춘천시 송암동에 안장되었다.
토토 롤링은 1904년 두 형과 함께천도교에 입교하여 천도교의 민족운동과 토토 롤링운동에 깊이 관여하였다. 1911년 천도교회월보 학술부 기사를 담당하면서 잡지계에 몸담기 시작한 이후, 개벽사 잡지 창간과 발행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개벽사의 대표 잡지『개벽』은 창간과 강제 폐간, 속간과 폐간 그리고 복간을 거듭하였는데, 토토 롤링은 그 영욕의 시간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한 유일한 인물이다.
또한 토토 롤링은 식민지 당국의 언론 탄압에 적극적으로 저항한 대표적인 언론인이다. 그는 1924년 23개 단체가 모인바카라 꿀팁5B8;론에서 실행위원으로 선출되고, 1925년 4월 15일부터 사흘 동안 열린 ‘전조선 기자 대회’에서 서기를 맡아, 토토 롤링 자유를 위한 5개 항의 결의문 채택을 주도하였으며, 1931년 3월에는 개벽사 대표로서 주요 잡지사 대표들과 함께총독부당국에검열규정 시정을 강력히 요청하는 등 언론 자유를 위해 헌신하였다.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에 토토 롤링과 관련한 ‘불허가 압수 및 삭제 출판물 목록과 기사’ 사건이 총 100건에 이른다는 사실은 그가 언론인으로서 견뎌온 지난한 시간을 증명해 준다.
토토 롤링은 『개벽』 등 당시 신문 · 잡지의 주요 필자로서 수십 개의 필명으로 수백 편의 글을 발표하였다. 글의 내용은 역사, 문학, 사상, 민속, 문화 등 지평이 넓고, 종류도 한시, 소설, 수필, 동화, 역사서사, 야담, 보고서, 논설, 논문 등 다양하고, 문체도 한문체, 국한문혼용체, 한글체 등 다채롭다.
토토 롤링의 시인 및 수필가로서의 면모는 주로 『개벽(開闢)』을 비롯한 몇몇 잡지에 발표된 그의 한시(漢詩)와 수필 작품에서 볼 수 있다. 저술로 『조선4천년비사(朝鮮四千年秘史)』 · 『해동염사(海東艶史)』(한성도서주식회사, 1931) · 『조선사외사(朝鮮史外史)』(명성사, 1947) · 『토토 롤링야담사화전집(韓國野談史話全集)』 제4권(서정출판사, 1971) 등이 있다다.
또한 『개벽』을 비롯하여『별건곤(別乾坤)』 · 『신여성(新女性)』· 『농민(農民)』 ·『학생(學生)』등 잡지의 주간 또는 기자로서 활약하였다. 이와 같이 토토 롤링은 근대 잡지의 선구자, 저항 언론인, 민족주의 문화운동가, 문필가 등 다양한 면을 지닌 인물이며, 언론, 종교, 문화, 역사, 문학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2010년 11월 1일 대한민국 정부는 ‘제45회 잡지의 날’ 기념식에서 토토 롤링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