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영산(靈山). 자는 우수(友叟), 호는 문암(聞巖). 아버지는 현감 신희수(辛希壽)이다.
1583년(선조 16) 이탕개(尼湯介)의 반란을 평정할 때 공을 세우고, 무과에 급제토토사이트추천 1591년 천성만호(天城萬戶)가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천성도(天城島)가 고도(孤島)이므로 김해성(金海城)으로 들어갔다가 성이 함락되자 적의 포위망을 돌파하였다. 합천군수 이숙(李潚), 박진영(朴震英) 등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하고, 곽재우군(郭再祐軍)과 합류토토사이트추천 활약하기도 하였다.
공휘겸(孔撝謙)이 적에게 항복토토사이트추천 영산에 웅거, 경상도관찰사를 자처하며 위세를 떨치자 단신으로 그의 진영에 잠입하고, 계략을 써서 사로잡았다. 1592년 7월의 영산전투에서도 공을 세워 곽재우의 천거로 현풍현감이 되어 선정을 베풀고, 백성을 안집토토사이트추천 목민관으로도 영남에 명성을 떨쳤다.
정유재란 때는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에 주둔하고 있던 곽재우군에 합류토토사이트추천 화왕산성전투에서 조전장(助戰將)으로 활약하였다. 난이 끝난 뒤 보성군수을 역임하였다.
죽은 뒤 병조판서로 추증되었고, 창녕의 문암정(聞巖亭), 영산의 도천서원(道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저서로는 『문암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