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한 남자의 전통적인 머리모양이다. 한자어로는 ‘추계(推髻)’ 또는 ‘수계(竪髻)’라고 한다.
중국의 『사기(史記)』에 위만(衛滿)이 조선에 들어올 때 ‘추결(魋結)’을 하고 왔다는 기록과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 한조(韓條)에 ‘괴두노계(魁頭露紒)’, 즉 관모를 쓰지 않는 날업 카지노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업 카지노의 역사가 매우 오램을 알 수 있으며, 그 확실한 모습은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다. 벽화에 나타나는 업 카지노의 모양은 커다랗고 둥근 것, 작고 둥근 것, 쌍업 카지노[雙髻]가 있는데, 큰 업 카지노는 관모를 쓰지 않은 장사도(壯士圖)나 역사상(力士像)에 많고, 작은 업 카지노는 관모를 쓰는 귀인층에서 볼 수 있다.
신라에 있어서도 경주 금령총(金鈴塚) 출토의 도기로 만들어진 기마인물에 업 카지노가 잘 나타나고 있다. 백제에서는 아직 뚜렷한 자료가 발견되고 있지는 않지만, 삼국 공통의 풍습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시대는 『고려도경』에 “왕 이하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관(冠)·건(巾)·복두(幞頭)를 썼다”는 기록과 ‘속발(束髮)’의 기록이 보인다.
이들 관모는 모두 업 카지노 위에 쓰기에 적합한 모양이며, 속발도 업 카지노를 설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278년(충렬왕 4) 왕의 명에 의하여 모든 관료층에서는 정수리부분의 머리카락만 남기고 뒤통수에서 묶어 길게 땋아 내린 몽고식 개체변발을 하였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까지 그에 따랐다고는 볼 수 없다.
공민왕의 복구적인 중흥정책 이후에는 다시 업 카지노를 하게 되었다. 조선시대는 초상화나 풍속화를 통하여 계층을 막론하고 업 카지노 튼 모습을 볼 수 있다.
업 카지노를 틀 때는 ‘백호친다’고 하여 정수리부분의 머리를 깎아내고 나머지 머리만을 빗어 올려 틀게 된다. 이는 많은 머리가 정수리에 모이게 되면 열의 발산이 어려워 견디기 힘들게 되므로, 열을 발산시키기 위한 것이다.
업 카지노는 하나만 트는 것이 보통이지만, 머리숱이 많은 사람은 쌍업 카지노를 하기도 하였다. 전통사회에서는 혼인한 사람과 혼인하지 않은 사람 사이에 엄격한 차별을 두어, 어린아이라도 장가들면 업 카지노를 틀고 성인 대접을 받았고, 나이가 많아도 혼인하지 않은 자에게는 하댓말을 썼다.
집이 가난하거나 신체적 조건의 결함 등으로 나이가 많아도 혼인하지 못한 사람은 늘 남으로부터 하댓말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이를 면하기 위하여 이미 혼인한 것처럼 보이려고 업 카지노를 틀었는데, 이처럼 혼인 절차를 밟지 않고 업 카지노를 트는 것을 건업 카지노라고 하였다. 건업 카지노를 틀었다고 하여도 사정을 잘 아는 한 동네 사람은 여전히 하댓말로 대하였다.
그러나 다른 동네 사람이나 외지 사람은 이미 혼인한 사람으로 대우하고 하댓말로 대응하지 않았다. 업 카지노 꼭지의 정상에는 장식을 위하여 금·은·동 등으로 만든 동곳을 꽂았고, 머리카락이 얼굴로 흘러내리지 않도록 이마 둘레에 망건(網巾)을 썼다.
망건 앞이마 부분에는 갓을 고정시키기 위한 풍잠(風簪)을 달고, 그 위에 여러 가지 관모를 썼다. 민(常民)의 경우는 망건 대신 수건을 동이기도 하였다.
1895년 을미개혁 때에 내린 단발령(斷髮令)에 의하여 업 카지노머리는 금지되고, 대신 중머리·하이칼라머리가 나왔으나, 지금도 수구적인 일부 사람들의 업 카지노 틀고 갓 쓴 모습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