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자삼(子三). 할아버지는 승수(承洙)이고, 아버지는 백종(百宗)이며, 어머니는 권정성(權定性)의 딸이다. 백형(百亨)에게 입양하였다.
일찍이 관직에 진출하여 현감을 지낸 뒤 1779년(정조 3) 정시문과에 장원급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쳤다. 1781년 홍주목사 시절에 불법사례가 있었다는 암행어사 이정운(李鼎運)의 보고에 따라 파직되었다.
뒤에 다시 기용되어 1787년 동래부사·온라인바카라간을 거쳐 전라도관찰사로 재임시 종형 창혁(昌爀)의 저리부채사건(邸吏負債事件)에 연루되어 일시 관직을 잃었다.
이듬해 동지 겸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온라인바카라헌·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개성부유수·이조참판·도승지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803년 예조판서로 원접사(遠接使)를 겸하여 청나라 사신을 맞았다.
공조판서로 동지사의 정사가 되어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서 좌참찬을 지냈고 1805년정순왕후(貞純王后)의 상을 만나 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가 되어 치상(治喪)을 맡았다.
이듬해 함경도관찰사를 거쳐 판의금부사·우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글씨에 능하였는데 글씨로는 황강서원묘정비(黃江書院廟庭碑)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