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중동학교고등과를 졸업한 후 1924년김익두(金益斗)의 설교를 듣고 기독교에 입신토토사이트추천다. 1928년일본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신학부를 졸업하였다. 같은 해 미국토토사이트추천 건너가 프린스턴신학교를 거쳐 1932년 웨스턴신학교에서 구약학(舊約學)토토사이트추천토토사이트추천석사 학위를 받았다.
1933년부터평안남도평양 숭인상업학교 성서 교사 겸 교목토토사이트추천 있으면서 평양장로회신학교의 기관지바카라 토토 사이트2E0;학바카라에 기고하기 시작하였는데, 신복음주의적인 신학 논문 발표로 토토사이트추천 신학의 자유로운 발전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1935년의 ‘아빙돈 단권 주석 사건’ 이후 『신학지남』에는 더 이상 글을 싣지 못했다.
1936년 8월부터간도용정(龍井)의바카라 전략C740;바카라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강원룡(姜元龍) ·안병무(安炳茂)등을 가르쳤다. 1940년 4월 새로 세워진 서울의 조선신학원(현, 토토사이트추천신학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1945년경동교회를 창설하여 목회도 하였으며, 1947년 토토사이트추천 노선 문제로 정통 시비에 휘말리다가 1952년 대한예수교장로교총회에서 제명되었다. 1953년 이에 반발한 교회들의바카라 온라인D55C;바카라창립에 따라 이 교단의 주도적인 토토사이트추천자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58년캐나다의 브리티시 컬럼비아대학에서 명예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61년 토토사이트추천신학대학 학장을 거쳐 1963년 10월 정년 퇴임과 함께 명예 학장으로 추대되었다. 그 뒤에 1965년 토토사이트추천기독교장로회 총회장, 1969년 토토사이트추천신학대학 이사장을 맡았다.
1937년 5월 간도에서 『십자군』을 창간하였는데, 2년만에 중단되었다가 1951년 다시 속간되어 제36호까지 발간하였다. 『제3일』은 1970년 9월부터 1974년 5월까지 정기 간행토토사이트추천 제45호까지 발간하였는데5·16군사정변이후의공화당정권에 향해 도전하고, 사회 참여와 민주화 운동을 주장토토사이트추천다. 실제로 1965년의 한일굴욕외교 반대투쟁 때부터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깊숙히 참여토토사이트추천다.
1969년 3선 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위원장, 1972년 국제앰네스티토토사이트추천위원회 위원장, 1973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공동 의장으로 일했다. 1974년 3월 12일 민주화 운동의 국제적 확대를 목표로 캐나다로 이주하였다. 그해 토토사이트추천 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미주 본부 의장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1975년 북미주토토사이트추천인권수호협의회 의장, 1978년 북미주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 연합 위원장, 1982년 토토사이트추천민주촉진국민연합 고문 등으로 활약하다가 1983년 귀국하였다.
2016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통합)는 공식적토토사이트추천 김재준 목사의 제명 결의를 철회하고 사과하였다.
대표적인 자유주의 기독교 지식인으로 분류된다. 자유를 인간 본성 자체로 보았으며 그 근거를 하나님의 형상에서 찾았다. 따라서 자유가 상실된 상태를 죄로 보았으며 토토사이트추천의 자유를 억압하는 정권에 대해서는 저항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정교분리를 넘어 교회의 정치적 사회 참여와 책임을 옹호하였다. 그가 추구한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는 인간의 내적 자유와 외적 자유가 총체적으로 보장되는 것이었다.
1960년대 후반 세계 신학계의 주요 담론인 ‘인간화’를 적극적토토사이트추천 받아들여 인간의 모든 구조악토토사이트추천부터의 해방, 인간 실존 전 조재로서의 구원, ‘인간 완성’을 주장하며 인간 존엄의 보존을 중요시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낙수 落穗』(1953) · 『요한계시록 주석』(1968) · 『황야에 외치는 소리』(1983) · 『범용기 凡庸記』(1983) 등이 있다.
1988년 ‘장공 김재준 목사 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다. 기념사업회는 장공기념강연회, 장공장학사업, 장공 추모 예배 등의 기념 사업을 관장하고 있다. 2002년 12월토토사이트추천훈장무궁화장이 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