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주량의 본관은 확실하지 않지만, 그의 행적이 신라의 전통을 지닌 인물들보다는 옛 고구려계의 인물들과 맥락이 통하고 있음을 들어 개성(開城) 부근에 위치한 황주(黃州)를 본관으로 이해한다.
1004년(목종 7) 과거에 장원급제하였으며, 그 뒤 시어사(侍御史)·어사중승(御史中丞)·호부상서(戶部尙書) 등을 거쳐 1034년(덕종 3) 정월 정당카지노 민회장(政堂文學)에 임명되고, 다시 참지정사(參知政事)·문하시랑평장(門下侍郎平章事)을 역임하였다.
1043년(정종 9) 정월에는 추충진절문덕광국공신(推忠盡節文德匡國功臣)으로 특진, 수태보(守太保) 겸문하시중(兼門下侍中) 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이처럼 정치적으로 정상의 위치에 있었을 뿐 아니라 학문적인 재질도 남달라한림원(翰林院)과 사관(史館)의 요직을 역임하며 세 차례나 지공거(知貢擧)를 맡기도 하였고, 거란과의 전쟁 후에는 정당카지노 민회장·수국사(修國史)로올림푸스 슬롯사이트CE6036권을 주관하여 편찬한 사실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밖에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 재임 시 이가도(李可道) 등을 도와 개경에나성(羅城)을 쌓는 데 공이 있었으며, 또 1038년(정종 4) 5월에는 귀화한 여진인(女眞人)의 구살죄(歐殺罪)에 대하여서눌(徐訥)등과 정연한 논리 대결을 편 사실이 있다. 이때 황주량은 귀화한 여진인을 그들의 본속법에 의해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정종(靖宗)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경문(景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