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이징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강화부유수, 부제학, 도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자구(子久)
동강(東江)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88년(선조 21)
사망 연도
1656년(효종 7)
본관
함양(咸陽)
주요 관직
이조참판|경기도관찰사|함경도관찰사|대사헌|강화부유수|부제학|도승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후기에, 강화부유수, 부제학, 도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구(子久), 호는 동강(東江). 증승지 여숙(呂淑)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영의정 여순원(呂順元)이고, 아버지는 한성부우윤 여유길(呂礻+谷吉)이다. 어머니는 신씨(愼氏)로, 현감 신준경(愼俊慶)의 딸이다. 한백겸(韓百謙)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10년(광해군 2) 생원이 되고 1616년 경안도찰방에 임명되었으나, 폐모론이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양강(楊江)에 은거하였다. 인조반정이 일어나기 며칠 전에 심명세(沈命世)가 가담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사양하였는데, 반정이 성공한 뒤 인조는 여이징의 태도를 오히려 옳다고 생각꽁 머니 카지노 3 만 사포서별좌(司圃署別坐)에 임명하였으나 사퇴하였다.

1624년(인조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626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다시 급제꽁 머니 카지노 3 만 승문원에 들어가 전적(典籍)을 거쳐 병조·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는 종묘의 위패를 모시고 강화도에 들어갔으며, 청나라와의 화의가 성립된 뒤 이조참판을 거쳐 경기도관찰사·한성부좌윤·예조참판을 지내고, 1641년 함경도관찰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그 뒤 부빈객(副賓客)·대사성·대사헌·강화부유수·부제학·도승지·공조참판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성리학에 밝았으며 선유(先儒)의 격언 20여조를 찬술꽁 머니 카지노 3 만 인조에게 바치기도 하였다. 시문에도 뛰어나 많은 묘비명을 지었고 또한 천문·역산(曆算)·서화에도 뛰어났다. 저서로는 『동강집(東江集)』이 있다.

참고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동명집(東溟集)』
『국조방목(國朝榜目)』
집필자
조계찬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꽁 머니 카지노 3 만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꽁 머니 카지노 3 만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