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열의 가계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1255년(고종 42) 판사천국사(判司天局事)로서 몽골군에게 파괴 당한지릉(智陵)을 수축하였다. 1259년(고종 46) 술사(術士)백승현(白勝賢)이 토토 바카라AC15;토토에 가궐(假闕)을 지으면 왕업(王業)을 연장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왕이 교서랑(校書郎) 경유(景瑜) 등과 함께 그 이로움과 해로움을 논하게 하였으나 그 주장을 꺾을 수 없었다. 이에 검증에 같이 동원된 경유 등이 “백승현의 말은 믿을 수는 없으나 한번 시험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라고 하여 삼랑성에 가궐을 짓도록 결정하였다.
1270년(원종 11) 왕이 강화에서 개경(開京)으로 환도(還都)하려 할 때 판태사국사(判太史局事)의 지위로봉은사(奉恩寺)에 있는태조(太祖)어진(御眞)에 환도에 대한 길흉을 점쳤다. 그 결과 ‘반은 살고 반은 죽는다.’라는 점괘를 얻는다. 안방열은 이 점괘를 개성으로 가는 자는 죽고삼별초(三別抄)를 따라 바다로 들어가는 자는 산다고 해석하였다. 그 결과 반란을 일으킨 삼별초를 따라 진도(珍島)로 남하하였다.
이때 또 “용(龍)의 자손은 12대에서 끝나서 남쪽으로 향해 가서 도읍을 건설한다[龍孫十二盡向南作帝京]라는 참언(讖言)이 여기에서 증험되었다.”라고 하면서 드디어 모주(謀主)가 되었다. 1271년(원종 12)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김방경(金方慶)과 몽골군에 의해 진도가 함락되면서 김방경을 만나려 시도하다가 정부군에게 살해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