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현경(顯卿), 호는 동원(東園). 김숙춘(金叔春)의 증손카지노 칩, 할아버지는 목사 김사원(金士元)이고, 아버지는 김응무(金應武)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로 이수관(李守寬)의 딸이다.
1540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47년(명종 2)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 2년 뒤 예문관대교(藝文館待敎)로서 춘추관기사관을 겸해 『중종실록(中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곧 홍문관카지노 칩 옮겨 정자·저작 등을 역임하고 홍문관박사가 되었다.
이어 부수찬·정언·수찬 등을 거쳐 1555년 김홍도(金弘度)·유순선(柳順善) 등과 사가독서하였다. 그 해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이조좌랑카지노 칩 도순찰사 이준경(李浚慶)의 종사관이 되어 광주(光州)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이조정랑이 되었다.
1556년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을 거쳐 사헌부집의로 재임 중, 명나라에서 사신이 오자 예관(禮官)카지노 칩 활약하였다. 1558년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에 올랐다가 곧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옮겼으며, 이 때 경연에서 경기내의 농민 생활 안정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어 우부승지를 역임하고 이듬해 이조참의로 전직되었으나, 사간원의 탄핵카지노 칩 다시 우부승지로 체직되었다. 그 뒤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춘천부사를 지냈고, 대사간·대사헌·부제학 등을 번갈아 역임하면서 군주의 공명정대한 처신과 윤원형(尹元衡) 첩자(妾子)의 허통(許通) 문제 등에 관해 활발한 언론을 하였다.
선조 즉위 후 도승지·예조판서를 역임하고, 병조판서로서 지춘추관사를 겸하였다. 1581년 우의정에 올랐고, 2년 뒤 좌의정이 되었다가 곧 물러나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정여립의 모반사건 처리에 공이 있어 1589년에 평난공신(平難功臣) 2등에 책록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진 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나, 조헌(趙憲)의 탄핵카지노 칩 사직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천도 논의가 있자, 이에 반대하면서 서울을 지켜 명나라의 원조를 기다리자고 주장하였다. 결국 천도가 결정되자 윤탁연(尹卓然)과 함께 임해군(臨海君)을 모시고 함경도로 피난했다가, 회령에서 국경인(鞠景仁)의 반란카지노 칩 임해군·순화군(順和君)과 함께 왜장 가토[加藤淸正]의 포로가 되었다.
이에 임해군을 보호하지 못한 책임카지노 칩 관직을 삭탈당했다. 이어 다시 가토의 강요에 의해 강화를 요구하는 글을 받기 위해 풀려나 행재소(行在所)에 갔다가, 사헌부·사간원의 탄핵카지노 칩 추국(推鞫)당해 회천카지노 칩 유배가던 중 중도에서 죽었다. 숙종 때 허적(許積)의 건의로 신원되었다.